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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 대한 이중적 오해와 나름의 해명

뉴스위크 2021.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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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플라톤에 대한 첫 번째 오해

안녕하세요, 보궐선거 때문에 시끄러운데,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인) 플라톤을 인용한 글을 읽고 늘 써보고 싶었던 주제에 대해 주저리 해 봅니다. 선거 시즌만 되면 플라톤이 인용되는데, 제 생각에는 이와 관련하여 이중적인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물론 오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단편적으로 인용되는 것의 진의를 음미해보는 것도 시민적 참여의 일부라 생각합니다.

 

 

이 글인데요. 아마 한 번쯤은 보셨을 것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라는 문장인데요, 이 글을 처음 접하신 분들은 보통 시민적 참여를 독려하는 글로 읽으실 겁니다. 이게 제가 생각하는 첫 번째 오해입니다. 어쩌면 시민적 참여가 맞기는 맞겠습니다만, 그 '시민'의 대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소 다릅니다. 제가 출처로 적은 글의 댓글에서도 말씀해주시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이에 관한 팩트 체크가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통치하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받는 가장 큰 벌은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에 의해서 통치 당하는 것일세”에 해당한다. 앞뒤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듯 여기서 ‘정치를 외면한 사람들’은 민주정 하의 아테네 시민들이 아니라 ‘통치의 자격을 갖춘 현인들’이다.  지도자가 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인물이 직접 통치에 나서지 않으면 그 자신이 엉뚱한 사람에게 통치를 받게 되고 이것이 적격자의 입장에서 가장 큰 모욕이라는 이야기 다.

 

좀 더 자세히 맥락을 설명하겠습니다. 위의 기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글은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글인 『국가』 편의 일부입니다. 이 글은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 바람직한 국가란 무엇인지 등 철학의 전통적인 주제를 대화 형식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책인데요. 바로 이 책에서 플라톤의 그 유명한 "철학자-왕(Philosopher-King)" 이론이 등장합니다.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인데요. 그건 왜 그럴까요?

 

2) 플라톤의 철학자 왕 이론 - 플라톤에 대한 두 번째 오해

플라톤에 따르면, 어떤 것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목적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 그 수단을 적용하여 병을 고쳐야 하겠죠. 그런 원인을 가장 잘 알고, 수단을 가장 잘 고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의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것을 정치에도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국가가 목표로 하는 바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고, 가장 정의로운 국가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목적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바로 정의가 무엇인지1)를 알고, 정의를 실현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일 겁니다.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수천 년간 수많은 천재들이 그에 합당한 정의를 내려보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우리는 만족스러운 '정의에 대한 정의'를 얻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다시 말합니다. 일단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가정해 보고 생각해 보자. 이상적인 상태가 어떨지 생각해 보고 그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보면, 지금 우리가 어떤 것이 부족한 것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기로 합니다. 

 

그러면,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까? '앎'을 사랑하고, 참된 앎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누굴까? 철학(philosophy)의 본래 뜻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구나, 그리고 정말로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야. 그렇게 플라톤의 철학자-왕 이론이 도출됩니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대화 상대자 중 한 명은 그 의견에 태클을 걸죠. "선생님, 정말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라면, 왜 정치를 하겠어요? 명예도, 부도 관심 없는 사람인데 지혜를 갈고 닦으려고 노력하겠죠('정치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란 점은 굉장히 흥미로운 점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정치를 하게 만들어야 하죠?" 그러자 플라톤의 대변인 소크라테스가  대답합니다. "철학자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너희가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정의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정의 운운하면서 정치에 나서게 될 거야. 너희는 그 사람의 다스림을 받게 되겠지. 너보다 못한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면 네가 좋겠어? 이렇게 말하면, 철학자가 정치에 나서게 될 거야."

 

바로 이 맥락에서,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민주정이 아닌,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철학자들에게 통치를 일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말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면을 읽게 됩니다. 바로 위 기사에서 아래의 멘트가 지적하는 부분이죠.

 

플라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스승(소크라테스)에 독배를 쥐어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그는 난폭한 다수의 정치라는 뜻에서 ‘폭민정치’2)라고 칭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통치 체제로 민주주의가 아닌 ‘철인통치’를 주장한 엘리트주의자였다. 정치는 다수 민중이 아닌 특정한 엘리트의 몫이라는 것이다. 칼 포퍼는 그의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의 정치 철학을 가리켜 ‘전체주의의 원형’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플라톤의 문장이 민주 시민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문구로 쓰인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출처: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84

 

그리고 바로 이게 제가 생각하는 두 번째 오해입니다. 맞습니다. 플라톤은 당대 아테네의 민주정을 혐오했고, 무엇이 정의롭고 무엇이 그렇지 아는지 아는 자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엘리트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이 '두 번째 오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플라톤이 민주정을 혐오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 체제가 엘리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이성을 상실하여 폭력적인 체제가 되기 십상이라고, 그래서 민중의 힘을 등에 업은 독재자가 나타나 국가를 나락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국가』에서 공격하는 대상은 무지한 민중이 아니라,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도덕적이지도 않으면서 입만 살아 동료 시민들의 욕망만을 자극하는 정치 엘리트입니다. 그리고 그 비판 끝에 플라톤이 제안하는 체제는, 물론 많은 면에서 다르기도 하지만, 현대의 민주주의 체제가 가진 특성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따라서, 2400년에 이르는 그 큰 간극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플라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두 번째 오해'에 대한 대답입니다. 

 

3) 플라톤과 아테네 민주정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플라톤 당대의 '민주정'이 어떤 형태를 가졌던 것인지를 말해야 하겠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알려져 있다시피 매우 단순한 체제였습니다. 공무원은 제비뽑기로 뽑았고, 중요한 국가적 사항은 민회라고 불리는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정치인들의 연설을 듣고 투표로 의사결정을 했지요. 전쟁을 나갈지 말지, 전함을 만들지 말지 같은 주제들이 민회에서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실상은 어떤지 모르나, 플라톤은 이러한 시스템이 그 사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보다 소위 '말빨 되는' 사람들이 더 큰 입김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당시 아테네에는 정치 꿈나무들에게 그러한 '말빨'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인 고르기아스를 플라톤이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겠습니다. 물론,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 적대적인 사람이므로 실제 고르기아스와는 다른 부정적 왜곡을 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고르기아스에게 당신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고르기아스: 나는 그것을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법정에서는 재판관들을, 평의회장에서는 평의회 의원들을, 민회에서는 민회의원들을, 그리고 정치 집회에 해당하는 그 밖의 모든 집회에서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정말이지 이 능력을 가지면 당신은 의사를 노예로 삼을 수 있고 체육 선생을 노예로 삼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여기 있는 사업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즉 당신을 위해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겁니다. 당신이 대중들에게 연설을 해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플라톤, 『고르기아스』(김인곤 옮김, 이제이북스, 2011, 452e3).  

 

플라톤이 보기에 당대 아테네의 정치인들은 이 '말빨'4) 기술을 배워 사람들을 올바르지 않은 길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나라들을 공격하고5) 사람들이 절제와 정의가 아닌 탐욕과 지배를 선택하도록 만들고 있었지요. "의사를 노예로 삼을 수 있고 체육 선생을 노예로 삼는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이 '말빨'은 그 사안에 대해 실제로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을 의사결정에서 배제시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빨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요. 이런 생각은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정치가들, 밀티아데스나 키몬, 페리클레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하지만, 플라톤이 보기에 당시 아테네에는 하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정치가들이나 연설가, 고르기아스와 같은 선생님6)에게 다가가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함, 덕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등을 캐묻는 사람이 있었죠. 결국 그 정치가들이 저런 중요한 주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시민들이 '말빨'에 휘둘리지 않도록 쇠파리처럼 앵앵거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입니다. 플라톤이 보기에 당시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차지하고 있던 역할이 어떤 것인지는 플라톤의 첫 작품, 『소크라테스의 변명』 첫 부분에 나타납니다.

 

소크라테스: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에게 나는 이렇게 요구하고 청합니다. (...) 적어도 내가 보기엔 정의로운 요청이죠. 말투가 어떤 방식인지는 문제 삼지 말고, 혹시 더 형편없을 수도 있고, 더 괜찮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저 내가 정의로운 말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만 살펴보고 그것에만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재판관의 덕이고, 연설가의 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4, 18a).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재판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을 잘 못하니, 진실된 말인지만 따져 주시고 말빨이 좋은지 아닌지는 고려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플라톤이 보기에 이 점이야말로 동료 시민들을 "노예"로 삼기 위한 말빨 기술을 익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정치가들과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차이인 것이죠. 바로 '진실을 알'려고 하고,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결국 어떤 최후를 맞게 되는지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7). 아마도 이 때문일까요? 플라톤은 뛰어난 철학자가 나타나 권력을 쟁취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상황이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이상적인 국가라면 모름지기 그러한 철학자를 길러내고 자연스럽게 통치에 참여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국가』 에서 제안하는 철학자 양성 시스템입니다. 

 

4) 통치자의 요건

『국가』 를 읽으시는 독자들이 당황스러워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상 국가론을 제시하는 아주 고전적인 텍스트라고 해서 읽었는데, 이상한 비유들, 이상한 이야기들만 나옵니다. 특히 통치자에 대해서 논의하는 부분에서는 국가의 통치 권력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8). 오히려 그는 통치자를 어떻게 양성해야 하는지만 이야기하죠. 제 생각에, 플라톤은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떤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을 이루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으면 결국은 그 헛점을 발견해 타락하고 말 것이라고요. 그래서 이상국가가 아니면 모르겠으나9) 이상국가를 세울 것이라면 그 시스템보다는 그 통치자들을 어떻게 도덕적이고 참된 진리만을 따르는 이로 키울 것인지를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요.

 

헌데, 여기서 재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철학자를 길러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갖춘 아이들을 골라내야 한다고 말하자, 대화 상대자가 묻습니다. 여성은 어떨까요? 당시 아테네에서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이성적인 능력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등장인물 소크라테스가 대답합니다. "여자든 남자든 그게 중요하니? 똑똑하기만 하면 되지." 플라톤은 성별의 문제는 통치자의 요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10). 신분은 어떨까요? 『국가』 편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대화편 『메논』에서 플라톤은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노예조차도 재능만 있고 방법만 알려준다면 수학적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신분과 지적 능력은 관계가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두 대화편의 저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설사 노예 출신이더라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릴 수 있습니다.

 

즉, 플라톤은 그 사람이 여자든(이런 표현 자체가 위험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테네가 여성차별 사회였음을 상기합시다), 노예든, 어떤 출신성분을 가졌든지 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뛰어난 철학적 재능을 가졌다면 통치자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그야말로 '재능지상주의', '지식지상주의'를 펼칩니다. 어.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똑똑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면 하버드 나오고 어디 교수하고 CEO 했고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 아니야? 이거 되게 위험한 것 아닌가? 맞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식과 도덕성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안다'는 것에 대해 지금의 우리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정의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이상한 주장이지요? 이는 다른 전제들에 의해 작동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전제입니다. 이는 조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도, 그 일이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그게 착각이든 아니든) 그렇게 행동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방해물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닌 한) 그 행위가 자신에게 좋다고 믿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나라를 다스릴 만한 진정한 철학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위에서 우리는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플라톤은 '안다'는 말을 더욱 깊이 나갑니다.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정의가 좋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정의가 어떤 의미에서 좋은 것이며, 그 자신과 공동체, 공동체를 이루는 동료 시민들에게 어떻게 좋은 것인지, 왜 그것이 최상의 것인지조차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철학자는 정의로운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자신에게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보다) 좋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물리적인 한계로 정의를 행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정의를 행할 일은 없습니다. 정의가 나에게 좋은 한, 부정의는 나에게 항상 나쁜 것일 테니까요11).

 

그러므로 플라톤이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고, "지식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든지 좋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실제로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정의롭지 않다면,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척하지만 실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로운 체하며 동료 시민을 속이고 있는 상황이 플라톤이 바라보는 당대 아테네의 민주정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민주정 비판의 칼날은 사실 '무지한 대중'이 아닌 '무지한 대중과 야합하며 그 뒤에 숨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정치 엘리트'를 향하고 있습니다12).  

 

5) 나가며 - 현대 민주주의와 플라톤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엘리트주의자입니다. 한편 철학자를 통치자로 부르기 위해 "더 못한 이들에게 지배받을 수 있다"는 말로 설득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여기서 철학자 왕은 정의가 무엇인지, 좋음이 무엇인지를 알아 또한 단순히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의를 행하는 정의로운 자이기도 합니다(플라톤의 정의에 따르면 '단순히 안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출신 성분, 성별, 나이 등에 상관 없이 이러한 정의로운 철학자를 양성하거나 발탁하여 적극적으로 통치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아닌가요?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위에서 묘사한 아테네의 민주정과 많이 다릅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시민권을 가진 모든 이들이 다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몇 명의 엘리트가 제안한 연설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적 전문가" 계층을 별도로 양성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분야는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발탁하여, 그 사람들이 우리의 주권을 위임받아 대신 통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민주정 안에서도 '정치의 분업화'가 이루어 졌고, 이는 정치적 사안도 전문가를 필요로 하며 검증된 인력이 정치적 의사 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정을 비판하며 꽃피운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이 플라톤에서 기인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제안한 시스템과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은 같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줄 수 있으며, 실제로 정의로운 사람을 우리는 부리나케 찾고 검증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만 우리 사회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찾으면, 어떻게든 정치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 "너보다 못한 이들이 너를 다스리게 될 거야" 라는 협박까지 하는 한이 있어도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모두가 더 못한 이들에게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바로 이 점에서, 플라톤의 메세지가 '엘리트주의'적인 기반에 놓여 있지만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투표를 비롯한 '시민적 참여'가 바로 정의로운 사람을 가를 수 있는 검증 시스템의 중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국사를 맡길 수 있는 사람,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방식 또한 지금 우리의 체제가 그리는 이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정말 우리 사회에 어떤 정의가 필요하다고 믿는지, 그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 실현하려는 방법이 허황된 것인지 객관적인 근거에 기반한 것인지, 동료 시민이 끊임없이 캐묻고 대답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엘리트들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가진 욕망을 일시적으로 충족시켜주면서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것인지 끊임없이 따져 물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러고자 했던 것처럼요.

 

소크라테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만큼은 해 주길 부탁하는 바입니다. 내 아들들이  꽃다운 나이로 자라면,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괴롭혔던 것과 똑같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갚아 주세요. 그들이 덕보다도 돈이나 다른 뭔가를 우선하여 돌보고 있다고 여러분에게 여겨진다면 말입니다. 또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한인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하듯이 그들을 꾸짖어 주세요. 돌보아야 할 것들은 돌보지 않고,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면서 스스로 한인물 한다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4, 4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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